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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2월이었다. 리조트가 눈 무게를 못 이기고 무너진 후였고 진도 앞바다에서 배가 가라앉기 전이었다. 늦겨울이지만 초봄이었다. 바람은 싸늘했다. 하지만 추위는 물러나는 중이었다. 햇볕이 쨍쨍했다. 나무가 기지개를 폈다. 푹신한 기운이 비행단에 내려앉았다. 활기가 돌아다녔다. 피부로만 느낄 수 있는 활기, 싱그러움이었다. 늘 그랬듯이 전투기가 활주로를 떠났다. 엔진 소리가 귀를 찔렀다. 굉음은 전 부대로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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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가 코앞이었다. 시간은 2주도 남지 않았다. 나는 봄을 반겼다. 한가로움을 즐겼다. 마지막 2주는 전역자 교육으로 보내는 중이었다. 병사들은 약사 ASSA에서 착안해 그 교육을 아싸캠프라고 불렀다. 나와 제대 예정자들은 아침에 모여 저녁에 해산했다. 아싸캠프는 한가했다. 응급치료를 배우고 박물관에 가고 예비군 안내를 받았다. 우리는 느릿느릿했다. 우리는 예비-예비군이었다. 매일 전역은 다가왔다. 시간은 느렸지만 아주 느리진 않았다.
그 무렵 러브라이브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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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가 점심시간이었다. 밥을 먹고 1시까지 재집결해야 했다. 나는 식사를 끝내고 생활관에 갔다. 생활관은 조용했다. 야상을 벗고 바퀴 달린 의자에 앉았다. 발목이 아팠다. 자대에 오고 군화를 이렇게 오래 신은 적이 없었다. 늘 플라스틱 장화만 신어 왔기 때문이었다. 쉬면서 리모컨을 집었다. TV를 틀었다. 최근 부대가 IPTV를 설치한 참이었다. 문득 애니플러스가 생각났다. 애니플러스는 애니메이션 전문 채널이다. 그곳으로 채널을 돌렸다. 시각은 12시. 러브라이브가 시작되었다. 그것도 1화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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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프닝은 대단했다. 2차원과 3차원의 조화라니. 어느 쪽 하나 빠지지도 않았다. 일본 애니가 돈 들이면 이만큼도 하는구나 하며 놀랐다. 오프닝이 끝나고 여고생이 나왔다. 이름은 코사카 호노카. 호노카가 다니는 오토노키자카 학원은 학생 부족으로 폐교 수순을 밟는다. 호노카는 스쿨 아이돌이 되어 학생을 모으리라 결심한다. 러브라이브는 원래 음악부터 시작한 프로젝트다. 하지만 난 그걸 몰랐다. 내겐 배경지식이 없었다. 끽해야 음반 팔아먹는 애니겠거니 했다. 아이돌마스터도 이름만 알았고 내 머리엔 아이돌 애니라는 개념이 희박했다. 러브라이브가 오프라인까지 활동하는 프로젝트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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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노카는 부하들, 아니 아이돌 멤버를 모았다. 첫 화부터 ‘러브 애로우 슛’을 망상하는 푸른 머리, 이사장 딸 갈색 머리, 피아노 치는 빨간 머리, 냐냐거리는 주황 머리, 소심한 황토색 머리, 사투리를 쓰는 보라색 머리, 니코틴을 좋아하는 검은 머리. 마지막에는 그토록 아이돌을 반대하던 노란 머리 학생회장까지 그룹에 들어갔다. 그리고 그들은 μ‘s(뮤즈)가 되었다. 괜찮은 스토리였고 괜찮은 그림이었다. 그 와중에 난 니코니코니가 유행어가 될 것임을 직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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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는 오프닝이었다. 아까 말했지만 3차원과 2차원의 조화라니. 호노카가 나팔을 불고 니코가 윙크를 했다. 쓰다듬고 싶었다. 그러나 최고 중 최고, 오프닝의 화룡점정은 가사였다. 명언이라고 불러도 좋겠다. 한번 보여드리겠다.
それぞれが好きなことで頑張れるなら
각자가 좋아하는 일로 노력할 수 있다면
新しい場所がゴールだね
새로운 장소가 골이야
それぞれの好きなことを信じていれば
각자의 좋아하는 일을 믿고 있다면
ときめきを抱いて進めるだろう
두근거림을 안고서 나아갈 수 있을 거야
(출처 : 나무위키)
이제 꿈은 사치가 되었다. 목표가 생존인 요즘이다. 사람들은 노력하라고만 한다. 이건 밥 대신 빵을 먹으라는 소리다. 꿈이 왜 꿈인지 아는가. 현실이 아니라서 그렇다. 말 그대로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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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꿈을 꿨다. 완벽한 꿈은 아니었다. 허술했다. 모호했다. 애착도 적었다. 하지만 내 앞에 있었다. 난 서서 망설였다. 제대는 행복이었다. 하지만 제대 다음은 불행이었다. 큰 산을 넘을 예정이었다. 하지만 산맥은 끝나지 않았다. 난 꿈은 손에 쥐고 안절부절못했다. 그런데 오프닝이 말했다. 좋아하는 일을 믿으라고. 3화에서 호노카와 친구들은 무관중 라이브를 마친다. 그럼에도 선언한다. 이 일이 좋다고. 좋으니까 계속 할 거라고. 명심하라. 호노카는 100% 좋아서 아이돌을 시작하지 않았다. 홧김에 꿈에 발을 들인 것이다. 그러나 호노카는 전력질주를 시작했다. 호노카 앞에서 난 작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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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주 후 난 제대했다. 러브라이브는 끝까지 못 봤다. 아마 7화까지 봤을 것이다. 에리 들어오는 것은 봤으니. 나는 지금 호노카처럼, 오프닝 가사처럼 사는 중일까? 솔직히 아니다. 나는 지금도 망설인다. 하지만 망설이는 곳은 최소한 길 위다. 여기서 반전. 난 2기, 극장판은 안 봤다. 제일 좋아하는 멤버도 호노카가 아니다. 아무래도 난 러브라이브를 사랑하지는 않나 보다. 그래도 기억은 단단하다. 늦겨울이자 초봄이던 2014년 2월. 적적한 생활관. 거기서 군화를 신은 나. 그리고 호노카.


덧글
난이도는 개떡같아졌지만 즐거워졌습니다.
그사람들은 업데이트로 난이도가 바뀌어도 바뀐 줄을 몰라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