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러분 집 천장은 무슨 색인가? 흰색? 검은색? 초록색? 우리 집 천장은 상아색이다. 지금 이 글을 쓰는 학교 도서관 천장은 회색이다. 형광등이 줄지어서 누워 있고, 천장은 검은색 점들이 불규칙하게 가득하다. 사람들은 천장에 눈길을 잘 주지 않는다. 천장을 보려면 고개를 들거나 누워야 하는데, 고개를 들거나 눕는 사람은 많지 않다. 목 운동을 하기 위해 고개를 들고 아무 일이 없는 사람이 소파 위에 누울 수 있다. 그러나 그들도 목 근육을 풀거나 텔레비전을 볼 뿐, 천장에 관심을 주지 않는다. 천장, 너 외로워서 어떡하니?
그러나 천장에 신경을 쓰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인터넷 작가들이다. 그들 소설에는 이런 표현이 잊을 만하면 등장한다. ‘처음 보는 천장이다.’ 나는 인터넷 소설을 많이 읽지 않는다. 어쩌면 과장일 수도 있다. 혼자 밥 먹는 만화가 유행한다고 해서 정말 식당 아주머니가 여기 단 하나!를 외치지 않듯, ‘처음 보는 천장’도 그저 인터넷 글발을 까기 위한 표현일 수도 있다. 나는 인터넷을 검색해서 ‘처음 보는 천장’의 악명을 찾아보았지만 결과는 많지 않았다. 정말 과장이었나? 그러나 ‘천장’에 짜증을 내는 사람이 없지는 않았다. 아마 그런 표현이 소설에 있기는 있는 모양이다.
생각해 보면, ‘처음 보는 천장’은 그렇게 비난 받을 표현은 아니다. 주인공이 기절하거나 잠에 든 사이 다른 세계로 간다고 생각해 보자. 주인공이 의자가 망가진 무궁화호 열차에 탑승하지 않았다면 누운 채로 깨어나게 된다. 그러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천장이다. 그런데 그 천장이 집에서 보던 천장과 다르다면? ‘처음 보는 천장’은 자신이 원래 있던 곳에서 다른 곳으로 왔음을 상징한다. 아까 말했듯 사람들은 천장을 사랑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천장조차도 없다면? 무인도에 표류한 사람이 평소 좋아하지 않던 물건까지도 애지중지하는 모습이 떠오른다. ‘천장’은 집의 일부다. 즉 공간이다. 공간이 단번에 달라졌음을 표현하는 데에는 천장이 제격이라고 평론가 코스프레를 해 본다. 설령 ‘천장’이 헤밍웨이, 하루키급 표현까지는 아니더라도 쓰레기 같은, 작가와 장르를 비웃을 만한 유죄 표현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결국 죄는 표현이 아니라 다른 곳에 있다. 죄가 있다면, 먼저 흔하디흔한 사용 빈도에 있겠다. 얼마나 자주 나왔으면 사람들이 빙고를 만들고 놀까. 다음으로 죄가 있는 것은 장르다. 요즘은 툭하면 이세계(異世界)다. 착각인지 모르겠지만 요즘 특히 늘었다. 최근에 유행한다는 제로로부터 시작하는 이세계라든가, 이세계에 갔더니 이런저런 이유로 하렘왕이 되었다는 이세계 말이다. 의도야 뻔하다. 여기서 인정을 못 받으니 다른 세계에 가서 떵떵거리겠다는 마인드다. 뭐 현실에서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나부터 줄을 설 것이긴 하다. 장르 선택 자체도 무죄다. 판타지를 쓰고 싶으면 판타지를 쓰면 되니까. 문제는 전부 비슷비슷하다는 것, 그리고 반쯤은 자위용으로 소설을 쓰다 보니 긴장이 없다는 점이다. 세상에서 제일 쓰기 쉬운 장르가 판타지 아닌가. 현실을 쓰려면 공부를 해야 하는데, 판타지는 그냥 이래서 그렇다, 저래서 그렇다 하면서 핑계로 성벽을 쌓고 그 안에서 놀면 되니까.
표현은 무죄, 장르는 정상참작. 남은 것은 작가다. 누구는 쓰는 사람이 좋으면 독자가 있든 없든 괜찮지 않느냐고 따질지 모르겠다. 명작을 쓰든 쓰레기를 쓰든 작가 맘이니까. 그 말도 옳다. 하지만 작가에게는 그보다 2% 더 중요한 것이 있다. 솔직히, 작가도 사람인데 독자에게 사랑을 받고 싶다. 조금 더 좋은 작품을 만들고 싶다. 작가는 독자에게 관심을 원하고 동시에 독자와 전혀 상관없이 완벽한 작품을 짓기 원한다. 조금 모순처럼 들리지만 모순보다는 그저 살짝 충돌하는 두 가지 소망이다. 그런데 ‘천장’에는 둘 다 부족하다. ‘천장’은 이제 독자들에게 외면을 받을 위기에 처했다. 그리고 감히 장담하는데 ‘천장’을 쓰는 사람들 중 완벽한 명작, 마스터피스를 바라며 쓰는 사람은 절반도 되지 않는다. ‘천장’이 어색하다면, ‘천장’을 버틸 기둥이 단단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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